"내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리 딸이랑 같이 누워서 찍은 비디오가 있는데 그걸 계속 갖고 있어. 수시로 보거든. 아버지 살아생전 모습이 그거 하나야... 디지털 유산 상속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서울시 동대문구청 1층. 디지털 유산 개념이 생소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50대 여성 A씨. 취재진에게 설명을 들은 후 곧바로 고인이 된 아버지를 회상하며 디지털 유산의 상속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삼성에선 되고 네이버에선 안 돼?
개인은 생전에 수많은 디지털 흔적을 남긴다. SNS 게시물, 이메일 기록, 클라우드 저장 문서, 암호화폐 등은 고인이 된 후에도 온라인 공간에 여전히 남아 가치를 지닌다. 이를 디지털 유산이라 한다.
한국에선 이러한 디지털 유신을 상속받을 수 있을지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관련 법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카카오, 네이버, 삼성 등의 주요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부재 아래 자체적인 정책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삼성은 생전 사용자가 지정한 수신자에게 데이터를 상속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했지만, 네이버는 유가족에게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마다 제각각인 정책 때문에 소비자는 자신에게 맞는 플랫폼을 선택하기도 어렵고, 상속 절차도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유산 상속에 관한 논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18대와 19대 국회에서는 고인의 개인정보 보호와 유족의 접근권에 관한 법안이 발의됐다. 제21대 국회에서도 고인의 계정에 대한 접근과 상속을 허용하는 법안이 두 차례에 걸쳐 발의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모두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지난 2월 11일, 디지털 정보 접근 및 관리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는 법안이 다시 발의됐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주당 정준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이 법안은 유족이 정해진 절차와 범위 내에서 고인의 디지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고인이 생전에 정보 제공을 거부했다면 유족 요청에도 정보를 넘기지 못하게 한다는 조항 또한 담고 있다.
정 의원은 "그동안 유족들의 요구에 대해서 정보통신서비스사업자는 개인정보보호의 의무 때문에 공개할 수 없고, 사회적 대형 참사 또는 재난 시에만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기반해 제한적으로 공개해 왔다"며, 디지털 유산과 관련한 명확한 법적 근거가 부재한 현실을 지적했다.
유족의 고인 블로그·미니홈피 관리 권한 부여
제18대 국회
제18대 국회
유족의 고인 디지털 컨텐츠 관리 및 삭제 권한
이용자가 생전에 자신의 사망 이후 개인정보 처리방법 지정
19대 국회
21대 국회
유족이 블로그 등 디지털유산의 관리권한 승계
이용자의 장기 미접속, 사망, 실종 시 해당 계정 및 콘텐츠에 대한 처리 기준
21대 국회
22대 국회
유족의 디지털 유산 승계 및 생전정보 제공을 거부할 권리
알면 다르다: 인식 부족이 만든 준비의 공백
법 제도가 마련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많은 이들이 기업별 디지털 유산의 처리 기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글, 애플, 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은 사후 계정 위임 또는 관리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애플의 유산 관리자 추가 기능
삼성의 유산 관리자 추가 기능
디지털 유산 처리 기능 인지 여부
실제로 전연령층을 대상으로 자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26명 중 약 70%가 계정에 '사후 처리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답했다.
디지털 유산 처리 기능 이용 의향
해당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다수의 응답자가 관심을 보였다. 같은 조사에서 "계정 처리 기능을 이용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66.1%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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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디지털 유산 상속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관심은 낮은 한편, 사후 계정 처리 기능 자체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받고 싶지만 주고 싶진 않은' 복잡한 마음
"지금은 엄마가 죽고 얼마 안 돼서 굉장히 애틋하고 보고 싶고 그럴 순 있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그것도 애한테 짐이 되는 거 아닐까 싶다. 자식이 갖고 가야 할 짐이고 처리해야 할 거니까 그래서 상속하기가 좀 그래." -50대 응답자 B씨
계정처리기능에 대한 반응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디지털 유산 상속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드러낸다. 시민 인터뷰 중 "디지털 유산을 상속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도 있고, 설문조사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상속받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이 51.2%에 달하지만, 정작 "자신의 유산을 상속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은 68%에 달한다.
51.2%68%
고인의 디지털 유산을 상속받고 싶다 나의 디지털 유산을 상속하고 싶지는 않다
"고인의 디지털 유산을 상속받고 싶은가"
"나의 디지털 유산을 상속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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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제가 죽으면 제 트위터 트청해줄 유산관리자를 찾습니다…" 등의 글이 공유되며, 상속보다는 계정이나 데이터 삭제를 원하는 입장이 많았다.
그동안의 담론이 유족의 입장으로 전개된 반면, 상속할 입장에 있는 일반 대중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일부는 남기고, 일부는 지운다: 선택적 상속의 필요성
이 같은 거부감은 단순한 상속 회피가 아니라, 모든 정보를 넘겨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 50대 시민은 "부모 사진을 태우기도 참 그렇고 이것도 마찬가지지… 방대하지 않고 적당하게"라며 선택적 상속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사람들은 이제 디지털 유산을 단일 자산이 아닌, 민감도에 따라 일부만 남기고 일부는 삭제하는 형태로 다루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논의는 상속받는 입장에 머물러 있어, 상속하는 입장에서의 선택적 상속에 대한 고려는 부족한 상황이다.
참사가 있어야 주목받는 현실
2010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 "디지털 유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기사의 수이다.
그래프에 커서를 올리면 실제 기사 보도량 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주로 대형 참사 직후에만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관련 보도량은 세월호 참사(2014년), 이태원 사고(2022년), 무안공항 참사(2025년) 직후에만 급격히 상승했다. 평상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던 이슈가, 참사 발생 후에야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구조이다.
평소에는 디지털 유산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법적 장치의 부재로 인해 대부분의 유족들은 여전히 기업의 판단에 따라 고인의 디지털 기록에 접근하거나, 거절당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누구나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시대. 누군가에겐 사진 한 장, 메시지 하나가 마지막 인사이자 유산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사건이 있어야만' 이뤄지는 접근이 아니라, 사전에 보장된 권리로서 디지털 유산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유산, '잊힐 권리'도 함께 보장돼야
디지털 유산 논의는 이제 상속의 문제를 넘어 기억을 지울 권리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사망 후 온라인 정보처리 방식에 관한 법제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미 해외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프랑스는 2018년부터 사망자가 자신의 정보처리 방식에 대한 지침을 생전에 미리 결정할 수 있도록 법에 명시했다. 미국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접근 권한을 수탁자에게 부여하는 통일법 개정을 통해 상속 대상의 범위를 구체화했다. 이 같은 해외 사례는 사망자의 의사를 생전에 제도적으로 반영하려는 움직임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 디지털 유산에 대한 현행법이 전무한 실정이다.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을 계기로 국내 최초로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이 발의되면서 관련 담론이 생겼지만, 입법이나 정책적 진전은 미미했다. 이후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등 대형 재난 발생 때도 마찬가지로 디지털 유산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일시적으로 집중됐지만, 결과는 매번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지난 2월 10일 고인의 디지털 유산과 잊힐 권리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한 정준호 의원의 사진이다.
최근 2024년 12월 29일 무안 제주항공 참사 이후 정준호 의원이 발의한 의안은 유가족의 디지털 유산에 대한 접근을 제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시에 생전에 정보제공을 거부할 수 있는 '잊힐 권리'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다룬 의안이기도 하다.
잊힐 권리란 자신의 개인정보를 일정 조건 하에서 삭제하거나 더 이상 노출되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유럽연합(EU)의 GDPR에서 이미 인정된 개념으로 디지털 유산 논의에서도 중심축이 되고 있다. 생전 개인정보는 죽음 이후에도 보호돼야 하고, 유족 입장에서도 가족의 기록이 온라인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사용자 자기결정권과 유족의 접근권 사이의 균형을 강조한다. 법무정책연구원의 '디지털 유산 법제 정비에 관한 연구'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법과 상속법 간 충돌로 인해 유족이 고인의 계정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디지털 유산상속자 지정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용자가 생전에 유산을 원하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디지털 유산은 상속 받고 싶은 사람과 상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의 권리 충돌을 포함한다. 누구에게 남길 것인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지울지에 대한 결정권이 당사자에게 있어야 한다. 또한 법제화 논의도 이 쌍방향의 권리를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법안(정준호 의원 등 제안)이 디지털 유산에 대한 유족의 접근권과 더불어 생전에 정보 제공을 거부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도 이제는 참고할 해외 모델을 분석해 사망자의 자율권과 유족의 선택권을 모두 반영하는 법적 장치를 고민해야 할 때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사후는 이제 개인의 사생활이고 존엄성의 문제다. 살아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난 뒤에도 그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